좌의정 신도공 신수근 묘 치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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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홍범 작성일25-08-20 13:56 조회16회 댓글1건본문
이계집 제23권 / 제문(祭文)
좌의정 신도공 신수근 묘 치제문
〔左議政信度公愼守勤墓致祭文〕
이계의 나이 76세 때인 1799년(정조23) 기미년 5월에 중종의 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부친인 신수근을 제향하기 위해 지어 올린 제문이다.
정조는 1799년 5월 28일에 온릉溫陵의 조성 공사가 끝낝 지 60주년이 되는 날이자 단경왕후가 중종과 혼례를 올린 지 30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단경왕후의 부친인 익창부원군益昌府院君 신수근의 마을에 정표하고 승지를 보내 제사하게 하였다.
신수근의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근중勤仲, 호는 소한당所閑堂, 시호는 신도信度이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이다. 1506년 좌의정으로 있을 때 박원종 등이 연산군을 폐위하고 당시 진성대군이던 중종을 추대하려는 모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에 반정으로 살해당하였으며, 단경왕후도 왕비가 된지 7일 만에 폐출되었다. 1739년(영조15)에 단경왕후가 복위되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익창부원군에 추봉되었다.
경은 아림의 빼어난 기운을 받아 / 惟卿娥林鍾靈 (유경아림종령)
관진의 큰 가문의 후손이 되어 / 觀津華族 (관진화족)
성스러운 딸을 탄생시켜서 / 克誕聖女 (극탄성녀)
왕후의 자리에 있게 하였습니다 / 正位坤極 (정위곤극)
불행한 때를 만나 / 遭時不幸 (조시 불행)
국운이 험난함을 당하자 / 邦運中阨 (방운중액)
지위가 왕실의 인척이라 / 地均肺腑 (지균폐부)
의리상 나라의 화복을 함께하였습니다 / 義同休戚 (의동휴척)
발을 들어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 擧足左右 (거족좌우)
화와 복이 창졸간에 결정되는데 / 禍福倉卒 (화복창졸)
섬기고자 하는 곳에 마음을 다하여 / 專心所事 (전심소사)
의연히 뜻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 毅然靡奪 (의연비탈)
해와 달이 다시 빛나고 / 日月重光 (일월중광)
하늘의 덕과 땅의 덕에 배합하니 / 乾坤配德 (건곤배덕)
신하와 백성이 모두 추대하여 / 臣民咸戴 (신민함대)
적불이 붉게 빛났습니다 / 翟茀有爀 (적불유혁)
훈신이 사사로운 마음을 부려 / 勳臣逞私 (훈신령사)
하늘의 도를 감히 거슬렀으나 / 天常敢逆 (천상감역)
조강지처라는 하교에 / 糟糠之敎 (조강지교)
읽는 자들이 숨죽여 울었습니다 / 讀者掩抑 (독자엄억)
요화궁에서 적막하게 지내고 / 瑤華寂寞 (요화적막)
왕후로서 예장(禮葬)을 받지 못하니 / 園寢禮缺 (원침예결)
충언이 누차 일어났으나 / 忠言屢發 (충언누발)
정론이 오랫동안 막혔습니다 / 正論久鬱 (정론구울)
숙종대왕께서 유지를 남기시고 / 明陵遺志 (명릉유지)
영조대왕께서 계승하시니 / 寧考是述 (영고시술)
사당의 모습은 엄숙하게 되었고 / 廟貌有儼 (묘모유엄)
신과 사람이 기뻐하였습니다 / 神人胥悅 (신인서열)
아름다운 경이 우뚝이 서서 / 懿卿特立 (의경특립)
홀로 아름다운 절개를 온전히 하여 / 獨全姱節 (독전과절)
그 갑자 기미년이 다시 돌아오니 / 歲甲重回 (세갑중회)
저의 감회가 더욱 슬픕니다 / 予懷增慽 (여회증척)
멀리 온릉을 바라보며 / 遙瞻溫陵 (요첨온릉)
공경히 맑은 술을 올리오니 / 敬薦泂酌 (경천형작)
이미 봉사손을 녹용하였고 / 旣錄嗣孫 (기록사손)
또 붉은 정문까지 세웠습니다 / 又侈丹綽 (우치단작)
국구의 충절에 정려한 것은 / 國舅旌忠 (국구정충)
그 예가 실로 예전에 드문 것이라 / 禮實曠昔 (례실광석)
근신을 보내 대신 술을 올리오니 / 近臣替酹 (근신체뢰)
영령은 부디 흠향하소서 / 靈其歆格 (영기흠격)
▷홍양호(洪良浩, 1724년 ~ 1802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양한(良漢). 자는 한사(漢師), 호는 이계(耳溪). 이조판서, 공조판서, 예조판서, 사헌부대사헌, 판의금부사, 한성부판윤, 예문관제학, 홍문관제학, 형조판서와 양관대제학 등을 지내고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조선 정조2년(1778년) 함경도 경흥부사(慶興府使)로 재직할 때 지방 행정에 관한 자신의 소견을 체계화하여 기술한 『목민대방(牧民大方)』을 저술하였고, 이 책은 『이계외집』 권11에 수록되었다. 문집으로는 『이계집』이 있다.
[주-D001] 좌의정 …… 치제문(致祭文) :
이계의 나이 76세 때인 1799년(정조23) 기미년 5월에 중종의 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부친인 신수근(愼守勤, 1450~1506)을 제향하기 위해 지어 올린 제문이다.
정조는 1799년 5월 28일에, 단경왕후 신씨의 능인 온릉(溫陵)의 조성 공사가 끝난 지 60주년이 되는 날이자 단경왕후가 중종과 혼례를 올린 지 30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단경왕후의 부친인 익창부원군(益昌府院君) 신수근의 마을에 정표하고 승지를 보내 제사하게 하였다.
신수근의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근중(勤仲), 호는 소한당(所閑堂), 시호는 신도(信度)이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이다. 1506년 좌의정으로 있을 때 박원종(朴元宗) 등이 연산군을 폐위하고 당시 진성대군(晉城大君)이던 중종을 추대하려는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에 중종이 반정한 뒤에 살해당하였으며, 단경왕후도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폐출되었다. 1739년(영조15)에 단경왕후가 복위되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익창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주-D002] 경은 …… 되어 :
아림(娥林)은 거창(居昌)의 옛 이름으로, 신수근의 관향이다. 관진(觀津)은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황후인 두 황후(竇皇后)의 고향으로, 오늘날 하북(河北) 무읍(武邑)의 동남 지역이다. 여기서는 단경왕후를 배출한 거창 신씨 집안을 일컫는다.
[주-D003] 발을 …… 않았습니다 :
신수근이 사위인 진성대군, 즉 중종을 따르지 않고 처남이자 임금인 연산군에게 의리를 바쳐 죽음을 맞았다는 말이다.
[주-D004] 해와 …… 빛났습니다 :
중종이 반정하여 왕으로 추대되자 신씨가 왕후의 자리에 올랐다는 말이다. 적불(翟茀)은 꿩 깃으로 장식하고 휘장을 친 수레를 말하는데, 귀족의 부녀들이 탔다고 한다. 여기서는 단경왕후 신씨를 말한다.
[주-D005] 훈신(勳臣)이 …… 울었습니다 :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된 것을 말한다. 중종반정 후 성희안(成希顔)ㆍ박원종(朴元宗)ㆍ유순정(柳順汀) 등 공신들이 신수근을 살해하고 단경왕후 신씨를 폐위시키기를 주장하자, 중종은 “아뢰는 바가 심히 마땅하지만, 조강지처인데 어찌하랴.[所啓甚當, 然糟糠之妻, 何以爲之?]”라는 전교를 내렸다. 《中宗實錄 1年 9月 9日》 《英祖實錄 15年 3月 11日》
[주-D006] 요화궁(瑤華宮)에서 적막하게 지내고 :
단경왕후가 폐위되었다는 말이다. 요화궁은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곽 황후(郭皇后)를 폐위하여 유폐시킨 곳이다. 여기서는 단경왕후 신씨가 폐출되어 거처하던 곳을 말한다. 《宋史 卷242 后妃列傳 仁宗郭皇后傳》
[주-D007] 충언이 …… 막혔습니다 :
단경왕후 신씨를 대신해 왕비에 오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가 1515년(중종10) 3월에 승하하자, 담양 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순창 군수(淳昌郡守) 김정(金淨)이 상소하여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와 박원종 등의 추죄(追罪)를 간언하였다. 하지만 대사헌 권민수(權敏手)와 대사간 이행(李荇) 등이 박상과 김정의 처벌을 주장하여 박상은 전라도 나주(羅州)로, 김정은 충청도 보은(報恩)으로 각각 유배되었다. 《中宗實錄 10年 8月 8日ㆍ11日ㆍ13日ㆍ24日》
[주-D008] 숙종대왕께서 …… 기뻐하였습니다 :
숙종은 1698년(숙종24) 9월에 전 현감 신규(申圭)가 상소하여 단종과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청하자, 신씨의 복위를 결단하지 못한 채 연경궁(延慶宮) 옛터에 사당을 지어 신주를 봉안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어 숙종은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에게 감회를 드러내는 시를 지어 “옛날에 원비로서 지존의 짝이 되었는데, 밤에 건춘문으로 나가니 백성들이 원통해했네. 애달파라 어찌 복위의 논의 없으랴만, 어찌하랴 이제 와서 임금의 마음 알 수 없으니.[昔在元妃配至尊, 建春夜出國人冤, 惻怛那無追復義, 柰玆不識聖心存.]”라고 하였다.《肅宗實錄 24年 9月 30日》 《燃藜室記述 卷7 中宗朝故事本末》 《耳溪集 卷30 晉州牧使贈左承旨申公墓碣銘》 영조는 1739년(영조15) 3월 28일에 신씨를 복위하여 단경(端敬)이라는 시호를 추상하고, 휘호를 공소순열(恭昭順烈)이라 하였으며, 능호를 온릉(溫陵)이라고 하였다. 한편 1739년(영조15) 3월 11일에 유학(幼學) 김태남(金台南)이 상소하여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다시 청하자, 3월 13일에 영조는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는데 신하들 대부분이 복위하여 종묘에 부묘(祔廟)하기를 청하였다.《영조실록》이날 기사에 “일이 중대한 데에 관계되므로 의논을 모아 내가 자전(慈殿)께 고하였더니, 자전께서 ‘선왕 때에 일찍이 복위하려 하였으나 대신의 의논이 일치되지 못하므로 거행하지 못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라는 내용이 보이는데, 숙종대왕의 유지는 이를 말한다. 자전은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仁元王后)이다.
[주-D009] 이미 …… 세웠습니다 :
《정조실록》 23년 5월 28일 기사에 “좌의정 증 영의정 신도공 신수근의 묘에는 승지를 보내어 제사를 올리게 하라. 봉사손(奉祀孫)은 이름을 물어보아 오늘 정사에서 본릉의 참봉으로 의망해 들이도록 하라.”라는 정조의 명이 보인다. 또 신수근의 집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을 즉시 거행할 것을 예조가 청하자 정조가 윤허한 내용이 있다.
댓글목록
신용재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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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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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영조와 정조 시대 단경왕후로 복원되고 중종시대의 오류를 바로 잡게 된 것은 의를 숭상하는 우리나라에서 지극히 다행스러운 조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계의 치제문 또한 감동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