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씨족의 하나로서 거창신씨(居昌慎氏)의 역사(歷史)는 11세기(1068년)부터 시작되였고 정사(正史)인 고려사(高麗史) 기록에 근거하기 때문에 모두가 명료한 사실로 되어 있다. 이점은 우리나라 다수 씨족의 기원이 전설을 빌려 모호하게 설명되어 있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거창신씨(居昌慎氏)의 시조는 공헌공(恭獻公) 휘(諱) 신수(慎修)이다. 공헌공은 원래 중국 송나라 개봉부인(開封府人)으로 송(宋)의 진사이었는데 1068년(고려 문종22년) 음력 7월에 고려와 송의 외교관계를 개설하기 위한 사절단의 한분으로 고려의 수도 개성에 왔다가 귀화하여 고려인이 됨으로써 거창신씨의 시조가 되었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공은 학식이 매우 높고 의 에 정통하다고 하였다. 관직은 시어사(종5품)를 거쳐 좌복야(左僕射) 참지정사(叅知政事)를 거쳐 정1품 수사도(守司徒)를 역임했다.

 

“高麗史” “世家”에는 또한 “문종29년(서기1075년)을묘12월 정미에 신수(慎修)와 盧師象이 함게 侍御史(종5품)가 되었다고 하였다.

 

또 “高麗史” “世家”에는 “숙종6년(서기1101년) 신사2월에 졸하니 왕이 신하를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시호를 공헌(恭獻)이라 하였다. 수(修)는 원래 송나라 사람인데 매우 학식이 있고 의술에도 매우 정통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고려사” ‘列傳“에서는 공헌공의 아드님 상서공(尙書公) 신안지(慎安之) 조(祖)를 서술한 글에서 아버님 공헌공에 대해서도 언급하기를 ”신안지의 자(字)는 원노(元老)이다. 역시 송나라 개봉부 사람인 아버지 수(修)는 문종조에 바다길로 배를 타고 동래(東來)했는데 학식이 있고 또한 의술에 정통하였다. 과거에 등제하여 관직이 수사도 좌복야 참지정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공헌이다.“ 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고려사” “세가”에는 문종22년(1068년) 음력 7월 기사에 송나라로부터 고려 수도 개성에 도착한 2개의 집단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 하나는 그동안 단절되였던 외교관계를 회복하여 재개하려고 송 황제의 명을 받고 파견된 황신(黃愼) 일행과, 다른 하나는 무역을 하러온 송나라 상인 임녕(林寧) 일행이었다.

 

위의 자료들은 매우 단편적인 것이지만, 이를 종합하여 면밀히 검토하면 대개의 줄거리는 알수 있다.

 

서기 1068년 (고려 문종22년) 음력 7월에 송나라 진사 신수(慎修)가 고려와의 국교 재개와 친선 강화를 위해 송 황제 신종의 명을 받고 파견된 송나라 사절단의 일행으로 고려의 수도 개성에 도착하였다.

 

원래 고려와 송은 왕조 개창 이래 가장 친근한 이웃나라로 활발한 외교, 통상, 문화교류를 행해 오던 관계에 있었다. 그러다가 북방에서 거란(契丹)이 발흥하여 송과 고려를 여러차례 침략하고 송과 고려의 육로를 차단하였다. 뒤이어 북방에서 또 여진족이 발흥하여 금나라를 세워서 송을 압박하였다. 송은 고려와 동맹해서 거란과 금나라등의 견제책으로 고려에 사신단을 파견하도록 명하여 이에 송 황제 신종은 황신등을 고려에 파견하게 된 것이다.

 

당시 송나라 사신단은 귀국했으나 신수(慎修)는 고려에 남아서 고려인으로 귀화하였다. 신수(慎修)가 고려에의 귀화가 고려국왕 문종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는지, 또는 신수(慎修)의 소망에 의한 것이었는지, 또는 양쪽의 합치에 의한 것이 었으면 어느 쪽의 비중이 컸는지 오늘날에 와서는 정확히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신수(慎修)는 송나라에서 이미 진사시에 합격한 진사로서 장래가 보장된 신분이었다는 사실과 귀화후에 신수가 고려 국왕 측근의 시어사가 되고 귀화인으로서는 너무 파격적으로 최고위 관직을 역임한 것을 보면 고려국왕 문종의 요청에 의한 것이 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신수(慎修)는 고려에 귀화한 후 고려의 과거를 보는 절차를 밟은 후에 고려국왕의 측근이 되어 1075년에 시어사가 되었고 계속 승진하여 수사도 좌복야 참지정사를 역임하였다. 사도는 정1품의 관직으로서 삼공의 하나였다. 신수(慎修)가 서거했을 때에는 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대신 고제를 드리고 시호를 공헌이라고 내리는 우대를 받았다.

 

고려시대에 신하의 종세를 당하여 국왕이 특히 고제를 드리고 시호를 내린 것은 분명 파격적 우대라 할 수 있다.

 

공헌공 신수(慎修)는 1068년 고려에 귀화하여 고려의 정일품 최고위 귀족으로서의 거창신씨의 시조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