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居昌)이 단본(單本) 관향(貫鄕)인 거창신씨(居昌慎氏)의 시조(始祖) 恭獻公 慎 修는 본래 송(宋)의 왕도(王都) 개봉부(開封府) 사람이다. 공(公)은 당시 송(宋)의 제도상 문과(文科) 대과(大科) 등과자(登科者 )인 진사(進士)였고, 학식(學識)이 높고 의학(醫學)에도 정통(精通)하고 있었다.

 

서기 1068년 고려(高麗) 11대왕 문종(文宗) 22년 7월에, 송(宋)이 고려와 다시 국교(國交)를 정식으로 터서 강성해진 거란(契丹)의 압력을 고려와 함게 물리칠 생각으로, 사신(使臣), 학자(學者), 무역상인 등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물자를 보내 왔는데 慎 修도 그 일행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들어와서 8월에 왕도 개경(開京)에 정착하게 되었다.

 

공(公)은 11대 문종(文宗)에서 15대 숙종(肅宗)에 이를는 5대에 걸쳐 장장 34년간을 역사(歷事) 했으며, 그간 품계(品階)도 정일품에까지 올랐고, 시어사(侍御史)에서 司徒, 좌복야(左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지냈다.

 

15대 숙종(肅宗) 6년 서기1101년 신사(辛巳) 12월에 졸하시니 나라에서 조제사(弔祭使)를 보내오고 공헌공(公獻公)의 시호(諡號)를 내리셨다.

 

시조(始祖) 공헌공(公獻公) 이후 고려 전성기에 계속 대대(代代)로 왕도(王都) 개경(開京)에서 높은 벼슬을 지내오던 신씨(慎氏)들은, 고려가 동란기(動亂期)에 접어들어 문신(文臣)들이 한때 몰락하고 무신(武臣)들이 다투어 집권(執權)하는 시대에 7세 집평 조(祖)도 부득이 무신(武臣)으로 나아가 몽고와의 항전시대(抗戰時代)에 장군, 신호위대장군(神號衛大將軍)으로 화전(和戰) 양면책을 구사하면서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며 크게 활약하였다.

 

몽고의 침략은 요원(燎原)의 불처럼 처참하게 전 국토로 확대되고 급기야는 왕도(王都)마져 강화도(江華島)로 옮겨 가고 말았다. 백성들은 개경(開京)을 버리고 보따리를 하나씩 이고 또 지고 우왕좌왕 사방으로 뿔뿔이 피난 나갔었다.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화주지역(지금의 함경도)의 항몽전쟁을 지휘하던 집평(執平) 조(祖)는 1258년(고종 45) 조휘(趙暉)·탁청(卓靑)등의 반란(叛亂)사건으로 순직하고 말았다.

 

정추(鄭樞-文簡公)가 “신랑기도천년한(慎郞旗倒千年恨)”이라 제시(題詩)하여 통탄했던 실로 치가 떨리는 원통한 일이었다.

 

검교군기감사(檢校軍器監事)인 8세 성(成)은 득세한 친몽파를 피해 부득이 정든 개경(開京)을 버리고 일로 남하(南下)를 계속하다가 오지(奧地) 거창(居昌)까지 와서 정착하게 되었다. 멀리 주위를 천미터도 넘는 험준한 산들이 병풍을 두르듯 둘러싼, 어떤 난리도 쉽사리 침범 못할 명당(明堂)의 대평지(大平地)였다. 전 국토가 초토화(焦土化)되는 기나긴 세월이 흐른 끝에 겨우 왕도(王都)도 강도(江都-강화도의 왕궁)를 벗어나 개경으로 돌아 왔었다.

 

10세 유(儒) 조(祖)에 이르러 개경(開京)으로 나아가 종이품(從二品  )품계(品階)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쇠퇴일로의 고려가 5백년의 국운(國運)이 다하게 되고 끝내 이태조(李太祖)가 조선(朝鮮)을 건국하고 말았었다. 신씨들의 벼슬은 새 왕조로 계속되여 나아갔다. 11세 사경(思敬) 조(祖)는 朝散大夫知 榮州郡事. 12世 인도(仁道)- 판서공(判書公)은 검교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 증호조판서(贈戶曹判書) 까지 지냈다.

 

조선왕조(朝鮮王朝)는 파란만장의 전통을 겪으면서 차차 발전의 기틀을 세우게 되었다. 이 무렵 우리 가문(家門)도 다시 크게 일기 시작했었다.

 

13세 아림부원군(娥林府院君) 이충(以衷)- 양렬공(襄烈公)이 아들 삼형제를 두게 되어 13대(代)에 걸친 독자(獨子) 단전(單傳)의 기적(奇蹟)을 벗어났었다. 신씨(慎氏) 계보(系譜)가 삼세파(三世派)로 갈라지게 되었고 이후 각 세파(世派)마다 자손이 번성하고, 곧 정승(政丞) 왕비(王妃)를 비롯 도관찰사(道觀察使) 판서(判書) 그 밖 혁혁한 벼슬이 속출하는 慎氏 百年의 전성기(全盛期)로 접어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