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뿌리공원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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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5-09-09 15:44 조회25회 댓글0건본문
뿌리공원을 찾아서
거창신씨유래 조형물 제작
절충장군공파종친회 제공
대전광역시는 중구 침산동에 소재한 보문산 기슭에 성씨 뿌리공원을 조성키로 하고 각 성씨에게 이에 적극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 참여 방법은 각 성씨가 조형물을 제작하고 그 조형물에 자기 성씨의 유래를 글로 새겨 공원에 설치토록 하는 것으로 이에 소요되는 비용은 각 성씨가 부담토록 하는 것이다.
뿌리공원의 조성목적은 각 성씨들이 조형물로써 자기 성씨의 유래를 밝히고 가문을 자랑함으로써 청소년들이 자기의 뿌리를 알고 훌륭한 조상으로부터 무언의 교훈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대전 황간공종친회는 1997년 2월 대전광역시로부터 이에 관한 공문을 접수하고 대종회(회장 학성)와 협의하였으나 대종회의 예산이 넉넉하질 못하여 황간공종친회에서 추진하기로 하였다.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던 중 충남 대전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종친들이 주관하여 조형물을 제작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충남 대전지역에는 17세 황간공 난동께서 유성에 낙향하신 이래 그 후손이 번창하였는바 이들이 성금을 모아 조형물을 제작키로 하였다. 여기에는 대전화수회 완성회장님, 절충장군종친회 각범회장님, 충남대 용인· 용협교수님 그리고 황간공의 지파인 진사, 절충장군, 군자감종중에서 적극적인 도움으로 우리 거창신씨유래 조형물을 뿌리공원에 49번째로 세울 수 있었다.
조형물은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는데 그 크기는 가로 2m, 세로 1.2m, 높이 3.5m이다. 이 조형물의 설계는 황간공파 종친회 학범회장이 직접 설계 하였는데 조형물은 바다에서 해가 뜨고 있음을 형상화한 것으로 거창신씨 가문이 영원히 번창함을 상징하였다. 그리고 조형물에 새겨진 우리 가문의 유래는 충남대학교 용인교수가 쓰고 글씨는 중앙중학교 각범 교장이 썼으며, 조형물의 제작은 공주에 소재한 신관석재가 담당하여 완성하였다.
이 조형물의 제작에 소요된 경비는 약1,500만원이 소요되었고, 1997년 11월 16일에 제막식을 가졌다. 이 조형물의 설치로 우리 거창신씨 가문을 자랑하고 우리 후손들이 긍지를 가질 수 있는 또 하나의 명물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조형물에 새겨진 『거창신씨 유래』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거창신씨유래비 전문
거창신씨의 시조는 신수(慎 修)이시다.
공은 중국 송나라에서 1068년 고려에 사신의 일원으로 오셨다가 문종의 권유로 귀화하여 고려인이 되시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공은 학식이 매우 높고 의술에 정통하였으며 관직이 사도 (正品)에 이른후 졸하시니 국왕이 시호를 공헌(恭獻)으로 내리시어 이후 거창 신씨는 모두 공헌공의 자손이라 이르게 되었다.
2세조 안지(安之)께서 병부상서가 되시면서 가문은 고려의 귀족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고, 그후 7세조 집평(平)께서 신호위대장군 동북면 병마사가 되시어 몽고군의 침략에 항전하다 전사하셨는데 얼마후 조정이 친원파에 의해 장악되자 慎문은 반원파로 지목되니 8세조 성(成)께서 거창으로 낙향하시어 본관을 거창으로 삼게 되었다. 우리 가문은 시조부터 독자로 이어오다가 13세조 이충(以衷)께서 참판공 기(幾), 서령공 언(言), 양간공 전(詮) 세아드님을 두시니 그 삼형제분이 파조(派祖)가 되시고 이후 자손이 번창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후 많은 선조께서 등과(登科)하여 慎문은 다시 명문사족의 가문으로 크게 융성하였는데, 15세조 승선 (承善)께서 세종대왕의 손녀 사위가 되시었을뿐 아니라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따님은 연산군비에 오르시고 아드님 수근(守勤)은 좌의정이 되시었으며 훗날 손녀가 중종비 (단경왕후)에 오르시면서 유명한 「치마바위」 전설을 남기시기도 하였다.
선조를 모신 서원과 사당은 유림에 널리 알려진 거창의 구연서원, 영암의 송양사 외에도 다수가 있고, 이곳 대전의 갈마공원에는 23세조 유천(惟天)공에게 숙종대왕이 내리신 효자정려가 있는바, 이는 선조님들이 조정의 중신으로 나라에 봉사하였을뿐 아니라 충효사상을 드높이고 학문에도 전념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어 후손들을 숙연하게 하고 있다.
32世孫 鏞仁 謹撰
31世孫 覺範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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